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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 비교

3. 셋의 후손들의 영적 전쟁

4. 신학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5. 결론

 

1. 서론

 

모든 제품에는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제품이라는 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고로 진리는 범사에 있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용 설명서가 있어야겠죠?

 

성경입니다.

그래서, “사용 설명서를 보고 살다 왔느냐?”라고 심판대에서 물어보실거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차별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거룩은 차별이 아니라 구별 나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로 하나님이 만든 자들은 이 사용 설명서를 가지고 우리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날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주께로 돌아왔을 때에 어떻게 살다 왔는지를 주께서 심판, 평가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살다 가야 할지....

이 사용 설명서를 오늘 창세기를 통하여 펼쳐보려 합니다.

특히 창세기 4장과 5장은 가인과 셋의 족보가 나오는데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대조하고 있는 건가?

그냥 족보인 줄 알았는데 가인의 족보와 아벨의 족보가 왜 이렇게 다른가?

 

정체성의  회복

430년을 뿌리 깊게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막 10가지의 재앙을 통하여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게 뭡니까? 모세 5경입니다.

그 모세 5경에 갑자기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 지금 이들의 정체성은 뭡니까? 노예입니다. 노예에서 정체성을 하나님이 깨워 줘야 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은 노예였고 그 위 조상도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왜 기근이 돼가지고 이집트로 가서 우리로 노예가 되게 한 것에 대한 불평불만 할 수 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일목요연하게 창세기를 통해서 너희는 이제 유일신을 섬기는 백성인 것을 다 풀어줍니다. 그러면서 이제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여전히 “뭐 봐 봤자 우리 족보가 노예의 노예지.” 하는 생각에 “너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돼. 노예의 노예 아니야. 너희의 인생사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눠지는 거야. 가인의 족보와 아벨을 대신한 셋의 족보로 나눠진다.”

족보의 첫 장을 열었을 때 첫 줄이 어떻게 써 있는지에 따라 판가름을 하는 거예요.

 

생명책이라는 것에 대해서 성경에 있죠. 내 인생의 책자에서의 저자!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라고 히브리서에 쓰여 있습니다.

 ‘믿음의 주’라는 걸 사전에서 보면 ‘창시자’라고 나오거든요.

믿음의 주여! 창시자를 바라보라.

책의 목차 아래 보면 책의 저자가 나오는데 일반 헬라어 사전은 저자라는 말대신 '창시자'로 많이 썼다고 했어요.

 

 

가인과 셋의 족보를 보면, 하나님은 가인과 셋을 통해 각자의 인생을 책자의 첫 장에 기록하셨습니다. 

이 기록은 무엇을 말하나요? 

내 조상이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생명의 책자는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살아온 일대기가 기록된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 책자의 제목을 통해 인생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제목은 모든 것의 주제를 간략하게 정리해주기 때문에, 책자의 첫 줄만 봐도 그 내용의 핵심을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구별할 수 있습니다.

"아, 이 사람은 가인의 후손이구나!" 또는 "아, 이 사람은 아벨을 대신한 셋의 후손이구나!"라는 것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인과 셋의 족보는 각 사람의  인생 선택을 어떻게 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내 인생의 저자! 우리 생명책이라는 성경에 말이 있죠.

그런데 내가 이제 죽어서 내 책자를 딱 살펴보면 이렇게 구분이 돼요.

창세기의 이 족보, 이 두 개로 구별이 돼요.

내 인생의 저자가 쓰신 책의 첫 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지, 그리고 내 인생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한 구절로 기록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가인의 후손에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셋의 후손에는 계속해서 언급되어 있어요.

그게 뭘까요?

 

이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인의 족보와 셋의 족보 비교

 

 

가인의 족보

가인의 족보는 창세기 4장 16절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여호와 앞을 멀리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세기 4:17-24 

가인은 에녹을 낳았고, 에녹은 이랏을 낳았으며,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두사엘을 낳았고, 므두사엘은 라멕을 낳았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맞아 아다와 씰라를 두었고, 그 후손들은 각기 다른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족보에서 주목할 점은 가인의 후손들이 세속적인 업적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로 도시를 건설하고, 음악과 철기 수공업 등 다양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어떻게 살았길래 세상에 하나님이 하나도 계수를 하지 않았지????

 

두 가지를 좀 살펴볼까요?

창세기 4장 20절을 야발에 대해 설명합니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으로 묘사되어 있고 본문은 야발이 단순히 소규모 가축 관리자가 아니라 풍부한 가축을 소유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하며 이는 그의 지능과 축산 기술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조상이 된다는 것은 번영을 가져오는 효과적인 가축 사육 방법을 개발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머리가 뛰어났으며 대규모 가축 관리에 필요한 노력, 성실함, 지혜가 강조됩니다

 

본문은 이어서 창세기 4장 22절로 넘어가 두발가인에 대해 보겠습니다.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기술자로 묘사되며 이는 그가 인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친 천재적인 금속 공예가였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은 인간의 관점에서 이러한 가인의 후손들이 사회에 기여한 바로 인해 존경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관점을 대조합니다

 

세속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날수를 계수하지 않으셨다고 말하며, 이는 신의 관점에서 이렇게 인생의 문화 문명을 좋게 만들어 유익을 주었는데 그들의 삶의 책자 앞에는 그들의 인생이 영원한 의미를 갖지 못했음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건 이거예요.

 

단 하루도! 

하루도 계수가 안 됐다는 것에서 강조하고자 싶은 건 단 하루도 계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굉장히 삶을 열심히 살았는데도 그래서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도 하루도 하나님이 계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건져 올리는 삶이 없어. 너희가 몇 년을 살았는지 관심이 없어.

하나님은 하나도 그들의 날수를 계수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보면 ‘세월을 하루도 건져 올린 삶이 없었더라’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하나님 앞의 삶과 사람 앞의 삶이 이렇게 다른 거예요.

 

여기서 가인의 자손들은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살지 않았구나..라는 걸 깨달을 수 있겠죠?

그렇다면 어떤 것이 이렇게 나눴을까요?   첫 구절에 나옵니다.

가인이 이제 살인을 하고 나서 하나님이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표를 해줬습니다.
그런 다음에 가인은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했습니까?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간 곳이 있습니다. 에덴 동쪽에 있는 놋땅으로 갔대요.

놋입니다. 에덴이라는 것은 기쁨과 환희가 있다는 뜻이에요.
여기에 에덴과 대조되게 써놨어요. 에덴이라는 글을 써놓고 또 놋이라는 장소 두 개를 대조해 놨어요.

뭘 말하는지 서로 비교하라는 거죠. 다르기 때문에 써놓은 겁니다.

 

에덴 여기는 기쁨과 환희가 있는 곳이에요.

은요?  떠 돌아다닌대요. 유리 방황한다는 거예요.

마음이 이리저리 떠돈다는 거야. 한 곳에 정함을 두지 못하고 끊임없는 그 헛헛함과 허함 속에서 떠 돈다는 거예요. 유리방황 다는 거예요. 방랑 생활을 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 밑에 보면 또 성을 쌓습니다.
'유리방황 하다'라는 놋의 이름은 기쁨과 반대되는 방황하면서 삶 자체가 불안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난 삶은 삶 자체가 불안한 삶이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무언가 안정을 위하여 성도  쌓은 건데, 끊임없이 불안하고 방황하는 삶을 산다는 거예요. 그걸 상징하기 위해서 말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보기에는 화려한 삶의 자손들로 보이자만, 하나님의 눈의 판단은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의 삶은 방황하고 불안한 삶 놋 땅에 사는 삶 이라고 말합니다.

 

셋의 족보

 

셋의 족보는 창세기 425~532절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를 포함합니다.

셋은 아벨을 대신하여 태어난 아들이며 그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고, 그 뜻은 "연약한 인간" 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티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노스를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5:1-32: 아담에서 셋, 셋에서 에노스를 거쳐 노아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친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는 각 세대의 주요 인물들이 몇 세에 아들을 낳고 몇 세에 죽었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셋의 족보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며, 노아를 통해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예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날짜를 계수하고 계수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날짜를 계수하지 않는 인간들은 상관 없이 수를 세지 않아요.

가인의 자손들은 날짜를 하나도 하나님이 계수하지 않았어요.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오늘을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이 안 돼 있어요. 

 

나중에 에녹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몇 세에 죽었더라라는 그의 삶을 하나님이 잘 기억해 놨다가 몇 세에 그의 목숨을 취하여 갔더라’라고 정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에녹의 삶의 날수를 함께 하시면서 다 세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인의 자손들은 그게 없어요. 그러면 삶을 한번 들여다볼까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도대체 가인의 족보의 자식들은 셋의 자식들의 족보처럼 왜 자세하게 기록이 안 돼 있을까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날짜를 계수했다는 건 모든 삶을 하나님이 받았다는 뜻입니다.

 

성경 어디와 연결되냐면 에베소서 5장 16절 말씀과 연결 됩니다.

에베소서 5장 16절
너희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은 뭐예요?

세월이라는 건 시간으로, 시간은 흘러가는 거예요. 계속 흘러가고 있죠.

흘러간다. 원래 단어는 뭐냐 하면 낚시! 건져 올리라는 거예요. 던져서 물고기를 건져 올리듯 낚아채라! 이런 말이에요.

시간을 낚아 채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그 흘러가는 시간대로 떠내려가도록 하지 말고 낚아채라는 거에요.

“낚아채”라는 건 “하나님께서 계수하게 만들어라!” 이 말이에요.

 

셋의 족보의 자손들을 하나님이 다 계수! 낚아채 줬다는 거예요. 날 수를 세어 줬다는 거예요.

그런데 가인의 자손들은 그냥 흘러갔다. 하나도 낚아채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크로노스(Chronos)인 유한한 세상 속에 그냥 산 거예요.

반면에 하나님이 낚아챘다는 건 카이로스(Kairos)인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살았다는 거죠.

 

그래서 카이로스라는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그 시간을 건지고 올리라는 거예요.
크로노스는 죽은 시간, 육체가 늙어지는 것처럼 죽은 시간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죽은 하루라는 거예요. 죽은 삶이라는 거예요.

살고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 죽은 사람, 그런 사람을 취급한 거예요.

 

4장 1절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쓰여 있는데 그것은 ‘날들이 쌓인 후에’라는 거죠.

이 날들이 쌓인 후에 가인의 자손은 계수가 안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셋의 자손은 모든 하루하루의 산 날이 모두 다 계수되었어요.

 

 

 

3. 셋의 후손들의 영적 전쟁

 

영적시각과  세속적 시각

 

셋의 후손들은 처음에는 영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이 땅에서의 삶을 티끌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창세기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

 

에노스라는 이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며, 이는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셋의 후손들의 타락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셋의 후손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끌려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영적 가치관을 잃고 세속적인 삶에 빠지게 됩니다.

창세기 6:1-2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속적인 유혹에 빠져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4. 신학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

 

하나님의 섭리

 

창세기 족보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보여줍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는 인류의 시작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설명합니다.

창세기 5:29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노아라 하였더라. “

 

노아의 이름은 '안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계속됩니다. 셋의 후손들은 타락했지만, 노아를 통해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창세기 6: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며, 그의 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일환입니다

 

 

결론

 

창세기의 족보와 셋의 후손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구속 계획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유혹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는 영원한 시각과 영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막연한 곳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나씩 ‘페이지 첫 장에는 이렇게 기록되는구나!’ 이렇게 기록되는 정확한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이 길로 완주해라.”

정확하게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막연하게 가인의 후손이 아니라 ‘아, 이래서 가인의 후손이 아니구나! 이래서 셋의 후손이구나! 아벨의 후손이구나!’하면서 내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고백하며 내 미래를 꿈꾸고 소망하며 기도하고 ‘내가 이 땅의 삶을 주님으로 말미암아 완주해야 되겠다.’ 또 다짐할 수 있는 오늘이 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모든 삶이 다양하듯 그날에 다 한 사람씩 구별하여 평가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와!  와! ~ 내 첫 장에 내 날 수가 계수 된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고 그는 365세를 정확하게 살았더라.’ 하고 그게 첫 장에 제목으로 기록되는구나!라는 걸 창세기에서 봅니다.

 

그리고 화려하고 유익한,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이라고 미쳤던 삶을 산 사람들은 단 하루도 하나님은 계수하지 않은 걸 봅니다. 다시 한번 이 말씀을 상기하면서 삶의 여정에 모든 날들이 하나님께 계수되기를 바라며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씀을 곱씹고, 모든 삶이 주님 앞에 계수되는 삶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를 닮아야 돼.
너를 만든 목적은 내 형상과 모양이 내 죄로 인해서 너희가 잃어버렸잖아. 다시 회복해야 돼.
너를 통하여 너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이 발견하게 돼야 돼.
그게 많이 발견될수록 너는 성화된 거고 적게 발견될수록 너는 지금 적게 성화되고 가는 거야.
많이 발견됐다는 건 니 날수가 많이 계수되고 페이지가 많이 넘어간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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